서론: 이름을 빌려준 친구와 기계를 팔려던 사업가
스타트업을 운영하는 박사라 대표는 공장 자동화 기계 제작을 위해 한 업체와 계약을 맺었습니다. 그녀가 만난 사람은 기술력이 뛰어나기로 소문난 강민혁 씨였습니다. 하지만 계약서상 대표자의 이름은 강민혁이 아닌 이지훈으로 기재되어 있었습니다. 강민혁 씨는 "이지훈 씨는 내 동업자이자 공동 대표"라며 자연스럽게 계약을 진행했습니다.
사실 강민혁 씨는 과거 사업 실패로 인한 세금 체납과 부도 전력 때문에 자신의 명의로 사업자 등록을 할 수 없는 상태였습니다. 그래서 예전 직장 동료였던 이지훈 씨의 승낙을 받아 그의 명의로 사업자 등록을 하고 영업을 해왔던 것이죠. 박사라 대표는 이런 복잡한 속사정을 전혀 모른 채, 이지훈 명의의 사업체와 기계 제작 공급 계약을 체결했습니다.
시간이 흘러 강민혁 씨의 신용 문제가 해결되자, 그는 이지훈 명의의 사업자 등록을 폐업하고 자신의 이름으로 새로 사업자 등록을 냈습니다. 이 과정에서 사업의 모든 자산과 부채를 포괄적으로 양도받는 형식을 취했습니다. 강민혁 씨는 박 대표에게 "이제 내 이름으로 사업을 하니 걱정 말라"며 계약 이행을 약속했습니다. 하지만 기계 제작은 차일피일 미뤄졌고, 결국 약속한 납기일이 지나도록 기계는 도착하지 않았습니다. 화가 난 박 대표는 소송을 결심했지만, 문득 의문이 생겼습니다. "나는 이지훈과 계약했는데, 지금 사장인 강민혁에게 책임을 물어야 하나, 아니면 명의를 빌려줬던 이지훈에게 물어야 하나?"
법적 쟁점: 계약의 당사자는 누구인가?
이 사건의 핵심은 타인의 이름을 빌려 계약을 체결했을 때, 법적으로 누구를 계약의 주체로 볼 것인가입니다. 즉, 이름이 적힌 '명의자(이지훈)'가 책임을 지는지, 아니면 실제로 도장을 찍고 협상한 '행위자(강민혁)'가 책임을 지는지의 문제입니다.
한국 법의 원칙과 해석
한국 법원은 계약 당사자를 확정할 때 두 가지 단계를 거칩니다.
첫째, 의사의 일치입니다. 행위자와 상대방이 "누가 계약 당사자가 될 것인가"에 대해 생각이 같았다면 그 사람을 당사자로 봅니다.
둘째, 객관적 해석입니다. 만약 서로 생각이 다르다면, 상대방의 입장에서 합리적으로 판단했을 때 누구를 당사자로 보는 것이 타당한지를 따집니다.
대법원은 계약을 체결하는 행위자가 타인의 이름으로 법률행위를 한 경우, 계약의 성질, 내용, 목적, 체결 경위 등 계약 체결 전후의 구체적인 제반 사정을 토대로 상대방이 합리적인 사람이라면 누구를 계약 당사자로 이해할 것인가에 의하여 당사자를 결정해야 한다고 판시하고 있습니다. (대법원 2011. 2. 10. 선고 2010다83199 판결 참조)
또한, 타인에게 자기 명의로 계약을 체결하도록 승낙한 경우에 대해서도 명확한 입장을 가지고 있습니다.
- 명의자가 제3자에게 자기 명의를 사용하게 허락했다면, 특별한 사정이 없는 한 그 효과는 명의자 본인에게 귀속됩니다.
- 상대방이 '명의자는 책임지지 않는다'는 사실을 미리 알고 양해하지 않은 이상, 명의자가 계약상의 책임을 져야 합니다.
한국 법원의 접근 방식
법원은 거래의 안전을 중요시합니다. 따라서 박사라 대표처럼 명의 대여 사실을 몰랐던 선의의 제3자를 보호하기 위해, 원칙적으로 명의자인 이지훈에게 계약 책임을 묻는 것을 인정합니다.
동시에, 실제 사업을 넘겨받고 본인 명의로 사업자 등록을 변경한 강민혁 씨에 대해서는 '중첩적 채무인수'의 논리를 적용합니다. 즉, 강민혁 씨가 기존 이지훈 명의의 사업에서 발생한 빚(계약상의 의무)을 그대로 이어받아 함께 책임을 지기로 한 것으로 보는 것입니다.
사례의 적용: 박사라 대표의 선택은?
박사라 대표의 경우, 계약 당시 서류상 당사자였던 이지훈과 실질적 운영자로서 사업을 포괄적으로 양도받은 강민혁 모두에게 책임을 물을 수 있습니다.
- 이지훈에 대한 책임: 이지훈 씨는 강민혁 씨에게 명의를 빌려주어 박 대표와 계약하게 했으므로, 계약상의 공급 의무 불이행에 따른 손해배상 책임을 집니다.
- 강민혁에 대한 책임: 강민혁 씨는 비록 계약 당시에는 대리인처럼 행동했지만, 이후 사업을 포괄적으로 인수하고 자신의 명의로 변경하면서 해당 계약의 이행 의사를 분명히 밝혔습니다. 이는 법적으로 채무를 함께 짊어지는 행위로 해석됩니다.
따라서 박 대표는 두 사람을 공동 피고로 하여 연대 책임을 물을 수 있습니다.
결론: 명의 대여 뒤에 숨은 책임을 찾아라
결국 박사라 대표는 강민혁과 이지훈 두 사람 모두에게 기계 미납에 따른 계약금 반환 및 손해배상을 청구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법은 이름 뒤에 숨은 실질적 운영자뿐만 아니라, 이름을 빌려준 사람의 책임도 가볍게 여기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와 같은 상황을 예방하기 위한 실무적인 조언은 다음과 같습니다.
- 사업자 등록증과 신분증 대조: 계약 체결 시 상대방의 신분증과 사업자 등록증 상의 대표자 이름이 일치하는지 반드시 확인하십시오.
- 위임장 확인: 만약 이름이 다르다면, 정당한 위임 관계가 있는지 확인하고 위임장 사본을 보관해야 합니다.
- 포괄적 인수 확인: 상대방의 사업자가 변경되었다면, 기존 계약의 효력이 유지된다는 점을 명시한 '계약 승계 확인서'나 '채무 인수 확인서'를 서면으로 받아두는 것이 가장 안전합니다.


















